중고 물품을 팔기 위해, 혹은 동네 스터디 모임 회원을 구하기 위해 인터넷 게시판에 무심코 연락처를 남긴 경험, 다들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거래가 끝나고, 회원을 다 구해 게시글을 삭제했는데 몇 달 뒤 모르는 번호로 ‘전에 ㅇㅇ 팔지 않으셨어요?’라며 사적인 연락이 온다면 어떨까요? 심지어 광고성 문자나 주식 투자 권유 전화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면요?
순간 섬뜩한 기분과 함께 찝찝함이 밀려옵니다. ‘내 번호를 아직도 저장하고 있단 말인가?’ ‘어디에 팔려나간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스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공개했던 번호이니 어쩔 수 없지’라며 넘어가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당신의 소중한 개인정보 주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이 글에서는 잠시 공개했던 당신의 연락처가 어떻게 디지털 세상의 ‘유령’이 되어 떠돌게 되는지, 그리고 그 유령을 어떻게 내 손으로 퇴치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쾌함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법의 문제입니다.
공개된 정보는 마음대로 써도 될까?
우리가 가장 먼저 바로잡아야 할 오해는 ‘인터넷에 공개된 정보는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해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 법은 정보의 ‘공개’와 타인의 ‘수집 및 이용’을 매우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행동 이면의 ‘의도’가 법적 판단의 핵심 기준이 됩니다.
당신이 중고 거래를 위해 연락처를 게시판에 올린 행위는, ‘이 물건을 사려는 사람에 한해, 거래가 완료될 때까지만 나에게 연락해도 좋다’는 매우 제한적이고 목적이 분명한 ‘동의’의 의사 표시입니다. 이를 법률 용어로는 ‘개인정보 수집·이용 목적의 특정’이라고 합니다.
마치 아파트 수리를 위해 잠시 집 열쇠를 맡긴 것과 같습니다. 수리 기사님은 약속된 시간에 수리를 위해서만 집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열쇠를 복제해 새벽에 마음대로 드나들거나,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연다면 이는 명백한 주거침입 범죄가 됩니다. 당신의 연락처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래라는 특정 목적이 달성되었다면, 그 정보는 즉시 파기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를 저장해두고 다른 목적으로 연락하거나 제3자에게 넘기는 행위는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하는 명백한 불법 행위입니다.
내 번호가 ‘유령 DB’가 되는 순간
그렇다면 이렇게 목적 없이 수집된 내 연락처는 어떤 위험을 초래할까요? ‘그냥 연락처 하나인데 뭐’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잠재적인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시한폭탄의 스위치를 누르는 것과 같습니다.
첫째, 각종 스팸과 스미싱의 먹잇감이 됩니다. 불법적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업체나 개인은 이렇게 어설프게 관리되는 연락처들을 긁어모아 데이터베이스, 즉 DB를 만듭니다. 당신의 번호는 ‘20대 여성, 서울 거주, 중고 유아용품 판매 이력’과 같은 꼬리표가 붙어 광고 업체나 보이스피싱 조직에 팔려나갑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맞춤형 광고 문자가 쏟아지고, 자녀를 사칭한 스미싱 문자를 받는다면 내 정보가 어딘가에서 유출되었다는 강력한 신호입니다.
둘째, 스토킹과 같은 2차 범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연락처를 저장했을지라도, 상대방이 당신의 SNS를 염탐하며 개인적인 정보를 더 알아내고, 이를 빌미로 지속적인 연락을 시도하거나 원치 않는 만남을 요구하는 등 스토킹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온라인의 익명성에 기댄 범죄는 더욱 대담해지는 경향이 있어, 피해는 고스란히 당신의 몫이 됩니다.
셋째, 더 큰 금융 사기의 ‘재료’로 사용됩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단순히 전화번호 하나만으로 사기를 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러 경로로 유출된 당신의 이름, 주소, 직장, 그리고 이 전화번호를 조합하여 완벽한 시나리오를 만듭니다. ‘ㅇㅇ택배입니다. 고객님 성함이 ㅁㅁㅁ 맞으시죠? 도로명 주소가 △△로 바뀌었는데 이쪽으로 보내드릴까요?’처럼 구체적인 정보를 언급하며 접근하면, 누구라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무심코 공개했던 연락처가 사기 범죄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 정보의 ‘삭제 버튼’을 누르는 법
이미 문제가 발생했다면, 즉 누군가 내 정보를 무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기하고 번호를 바꾸는 것은 최선이 아닙니다. 법이 보장하는 당신의 ‘삭제 요구권’을 당당하게 행사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해결책을 단계별로 알려드립니다.
1단계: 직접, 그리고 명확하게 삭제를 요구한다.
가장 먼저 취할 조치는 상대방에게 직접 연락하여 내 개인정보(연락처 등)를 즉시 삭제하고, 파기했음을 증명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때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개인정보보호법 제36조에 명시된 정보주체의 ‘개인정보의 정정·삭제 요구권’을 근거로 제시하며 냉정하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선생님께서 제 연락처를 저장하고 계신 것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소지가 있습니다. 즉시 삭제 후, 다시는 어떠한 목적으로도 연락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와 같이 명확한 의사를 전달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단계에서 문제가 해결됩니다.
2단계: 국가기관의 도움을 받는다.
만약 상대방이 삭제 요구를 거부하거나, 회피하거나, 혹은 연락이 두절된 경우, 이제는 공권력의 도움을 받을 차례입니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국번 없이 118)에 신고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개인정보 침해 사실에 대한 상담과 조사를 진행하며, 법 위반이 확인될 경우 해당 개인이나 사업자에게 시정명령이나 과태료 처분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신고 과정에서 상대방과의 통화 녹음, 문자 메시지 캡처 등 증거자료를 확보해두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3단계: 스토킹, 협박 등 범죄로 이어진다면 즉시 경찰에 신고한다.
상황이 더욱 심각해져 상대방이 지속적으로 연락을 시도하며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거나, 협박성 발언을 한다면 이는 더 이상 개인정보 침해의 문제가 아닌 명백한 스토킹 범죄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즉시 112에 신고하거나 가까운 경찰서를 방문하여 신변 보호를 요청하고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해야 합니다. 2021년부터 강화된 스토킹처벌법에 따라 가해자는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디지털 지우개를 내 손에 쥐는 법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방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완벽한 익명은 불가능하지만, 최소한의 노력으로 내 정보의 통제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는 복잡한 기술이 아닌, 간단한 습관의 문제입니다.
첫째, ‘안심번호’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당근마켓이나 중고나라 같은 대부분의 중고 거래 플랫폼은 판매자의 실제 번호 대신 가상의 일회용 번호를 노출해주는 안심번호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합니다. 통화나 문자는 실제 번호로 연결되지만, 상대방에게는 내 진짜 번호가 노출되지 않아 거래가 끝난 후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습니다.
둘째, 연락처 대신 ‘오픈채팅’ 링크를 활용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스터디 그룹 모집, 소모임 회원 모집 등 불특정 다수와 소통이 필요할 때 개인 연락처를 직접 노출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개설하고 그 링크를 공유하면, 내 프로필이나 연락처를 공개하지 않고도 목적에 맞는 소통을 안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개인정보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법 제도는 계속해서 정보주체, 즉 ‘당신’의 권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유럽의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 개념이 국내에도 점차 도입되고 있으며, 플랫폼 기업에게 이용자의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온라인에 흩어진 나의 흔적을 찾아내고, 한 번에 삭제를 요청하는 개인화된 디지털 정보 관리 서비스가 보편화될 것입니다.
온라인에 잠시 남긴 당신의 연락처는 공공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이름과 얼굴만큼이나 소중한 자산이자, 당신의 통제하에 있어야 할 권리입니다. 누군가 그 권리를 침해했다면 더 이상 불쾌함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법이 당신에게 부여한 ‘삭제 버튼’을 당당하게 누르세요. 당신의 작은 실천이 스스로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될 것입니다.
본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위한 것으로, 개별 사건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으니 중요한 결정 전에는 자격 있는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일부 게시물에는 광고·제휴 링크가 포함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