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재롱잔치에서 엉덩이춤을 추던 낯 뜨거운 영상, 부모님이 운영하던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박제된 촌스러운 사진들. 까맣게 잊고 살았던 과거가 어느 날 구글 검색 결과 첫 페이지에 떠 있다면 어떨까요? 심지어 내 이름 석 자를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다면 말입니다.
웃어넘기기엔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취업 면접관이, 새로 만난 연인이, 심지어 비즈니스 파트너가 당신의 이름을 검색하는 것은 이제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력서에 정성껏 담아낸 당신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당신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인터넷에 떠도는 20년 전 모습으로 첫인상이 결정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고 싶은 개인의 투정이 아닙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과거의 기록이 현재의 나를 부당하게 평가하는 족쇄가 되는, 명백한 권리 침해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2025년 대한민국 법은, 바로 그 족쇄를 끊어낼 강력한 열쇠를 당신의 손에 쥐여주고 있습니다.
잊힐 권리, 당신의 과거를 지울 법적 열쇠
인터넷에 떠도는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을 삭제해달라고 요구할 권리는 어디서 나올까요? 이는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라는 큰 개념에서 파생됩니다. 특히, 정보 주체 스스로가 게시한 정보가 아닌, 타인(주로 부모)에 의해 동의 능력이 없던 아동·청소년 시기에 올라간 정보에 대해서는 더욱 강력한 삭제 요구 권한이 인정됩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동의의 부재’에 있습니다. 5살 아이가 자신의 사진이 전 세계인이 보는 인터넷에 평생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진정으로 동의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법은 ‘아니오’라고 답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사진을 올리는 행위, 이른바 ‘셰어런팅(Sharenting)’은 사랑의 표현일 수 있지만, 법적인 관점에서는 자녀의 미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다분한 행위입니다.
이것을 집 계약에 비유해 봅시다. 부모가 5살 자녀의 이름으로 불리한 조건의 30년짜리 월세 계약을 맺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25살이 된 자녀가 그 계약의 부당함을 깨닫고 “이 계약은 내 의사로 맺어진 것이 아니니 무효”라고 주장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어린 시절 인터넷에 올라간 사진 역시 성인이 된 내가 그 효력을 부인하고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디지털 계약’과 같습니다.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은 만 14세 미만 아동의 개인정보 처리에 대해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요구하면서도, 정보 주체인 아동 자신의 권리를 점차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디지털 주홍글씨’의 위협
“어릴 때 귀여운 사진인데, 뭘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해?”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했던 과거의 기록이 어떻게 미래를 위협하는 ‘디지털 시한폭탄’이 되는지 알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방치된 어린 시절 사진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평생 당신을 따라다니는 위험한 꼬리표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심각한 범죄에 악용될 수 있습니다. 사진 속 학교 교복, 아파트 단지 이름, 동네 풍경 등은 당신의 성장 배경과 개인정보를 유추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됩니다. 2025년 현재, 고도화된 인공지능(AI) 기술은 사진 몇 장만으로 특정인의 신상 정보를 조합하고, 심지어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음란물이나 가짜 뉴스를 만드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내 어린 시절 사진이 나도 모르는 사이 디지털 범죄의 재료로 쓰일 수 있다는 끔찍한 현실입니다.
둘째, 사회적·직업적 평판에 치명타를 입힙니다. 익명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당신을 공격하려는 누군가가 신상털기를 할 때,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 바로 이 오래된 사진들입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이나 행동이 악의적인 캡처와 함께 조롱거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을 앞둔 상대방이, 당신의 전문적인 모습 대신 기저귀를 찬 사진을 먼저 보게 된다면 첫인상은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당신의 능력을 부당하게 평가절하하는 ‘디지털 낙인’으로 작용합니다.
마지막으로, 통제 불가능한 과거는 깊은 심리적 고통을 안겨줍니다. 내가 원치 않는 모습이 인터넷에 영원히 박제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이는 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갈 권리, 즉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권리’를 침해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과거는 보이지 않는 감옥이 되어 당신의 현재를 옭아맬 것입니다.
흑역사 삭제, 4단계 실전 해결 가이드
다행히도, 법과 제도는 당신 편입니다. 문제를 인지했다면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을 지우기 위한 현실적이고 합법적인 4단계 해결책을 장단점과 함께 제시합니다.
1단계: 게시자에게 직접 삭제 요청하기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법입니다. 사진을 올린 사람, 즉 부모님이나 친척에게 직접 연락해 삭제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자녀가 겪는 고통을 이해하고 흔쾌히 요청에 응해줄 것입니다.
- 장점: 절차가 복잡하지 않고 감정적인 소모가 적습니다. 즉각적인 해결이 가능합니다.
- 단점: 게시자가 아이디나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로그인이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이게 왜 문제냐”며 요청을 거부하며 가족 간의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2단계: 플랫폼 사업자에게 ‘권리 침해 신고’하기
게시자와 연락이 닿지 않거나 요청을 거부당했다면, 사진이 올라간 웹사이트(네이버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의 운영자에게 직접 삭제를 요청해야 합니다. 각 플랫폼 고객센터에는 ‘게시물 중단 요청’ 또는 ‘개인정보 침해 신고’와 같은 공식적인 절차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때 ‘본인의 동의 없이 어린 시절 사진이 게시되어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및 초상권을 침해당했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 장점: 개인 간의 감정싸움을 피하고 공식적인 절차를 밟을 수 있습니다. 플랫폼의 자체 규정에 따라 비교적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습니다.
- 단점: 플랫폼이 ‘권리 침해가 명백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요청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삭제 기준이 플랫폼마다 달라 일관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3단계: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 도움 요청하기
플랫폼 사업자마저 당신의 요청을 외면했다면, 이제 국가기관의 도움을 받을 차례입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KCSC)나 개인정보보호위원회(PIPC) 산하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를 통해 심의 및 조정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이 기관들은 플랫폼 사업자에게 삭제를 권고하거나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집니다.
- 장점: 법적 구속력을 갖는 강력한 조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비용이 들지 않으며, 개인이 직접 플랫폼과 싸우는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 단점: 처리 기간이 수 주에서 수 개월까지 소요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서면으로 명확하게 입증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4단계: 최후의 수단, 민사 소송 제기하기
위의 모든 방법이 실패했을 때 고려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입니다. 법원에 게시물 삭제 청구 소송 및 초상권 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승소 판결을 받으면 강제적으로 게시물을 삭제할 수 있습니다.
- 장점: 가장 확실하게 게시물을 삭제하고, 정신적 피해에 대한 금전적 배상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 단점: 변호사 선임 비용 등 경제적 부담이 크고, 소송 과정에서 겪는 시간과 감정 소모가 막대합니다.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어야 할 방법입니다.
‘기록하지 않을 권리’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방법들은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닦는, 사후적인 해결책에 가깝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의 뿌리, 즉 무분별한 ‘셰어런팅’ 문화 자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잊힐 권리’를 넘어, 애초에 원치 않는 기록이 남지 않도록 하는 ‘기록되지 않을 권리’를 이야기해야 할 때입니다.
부모 세대는 자녀의 디지털 미래를 책임지는 ‘디지털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을 자각해야 합니다. 사진을 올리기 전에 “이 사진이 20년 뒤 우리 아이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단 한 번이라도 고민해야 합니다. 전체 공개 대신 가족 공개로 설정하고, 아이의 얼굴이나 신상이 드러나는 사진은 신중하게 공유하는 최소한의 ‘디지털 에티켓’이 필요합니다.
플랫폼 기업과 정부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아동·청소년의 사진이 포함된 게시물에 대해 업로드 시 경고 메시지를 띄우거나, 해당 아동이 성인이 되었을 때 과거 기록을 검토하고 삭제할 수 있는 옵션을 선제적으로 제공하는 ‘프라이버시 친화적 설계’를 의무화해야 합니다. 법적으로는 아동·청소년 시기에 생성된 개인정보에 한해, 성인이 된 후 별다른 사유 없이도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디지털 소멸권’을 명문화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논의될 것입니다.
과거의 기록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현재를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지, 미래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인터넷 기록은 당신이 직접 쓰고 편집할 권리가 있는 당신의 역사책입니다. 누군가 당신의 허락 없이 써 내려간 페이지가 있다면, 이제는 스스로 지우개를 들고 당당하게 당신의 권리를 행사해야 할 때입니다. 당신의 5살 시절이 30대의 당신을 멋대로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오늘, 당신의 디지털 주권을 되찾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길 바랍니다.
본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위한 것으로, 개별 사건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으니 중요한 결정 전에는 자격 있는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일부 게시물에는 광고·제휴 링크가 포함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